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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utopos
한없이 낮은 자세, 이게 가능한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나를 낮춰도 어딘가에 더 낮은 이가 있을 텐데 아무리 쭈그러들어도 더 낮은 이가 있을 거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면 ‘나를 낮추는’ 윤리적 태도는 어느 지점에서 오만방자하게 비춰질 수 있다. 오만방자함이 문제라는 것이 아니라 ‘낮은 이’들과 눈을 맞추지 못한다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하여 관건은 낮추고자 하는 의지에 있지 않을까 싶다. 석가모니나 예수가 그리 했는지 역사적 팩트를 모르니 알 수 없지만 그 ‘지향’은 흔적으로 남아있는 것 같기도 하다. 좀 웃긴 얘기지만 ‘무한히’ 낮다는 건 이미 높다는 뜻이다. ‘저 아래’가 있으니까. 그러나 ‘저 아래’는 도대체 어디를 얘기하는 것일까. 제로가 있으면 마이너스도 있고, 마이너스에도 무한대로 수..
술마시면서 안주삼아 그런 얘길 가끔 했다. 김대중은 로고스가 강하고 노무현은 파토스가 쎄고 문재인은 에토스적 인간이다, 이런. 따지고 보면 로고스가 없는 인간은 파토스도 없고 에토스도 없다. 이성적으로 사고하지 않는 인간이 열정만 있다면 얼마나 후질까, 비합리적인 인간의 에토스는 얼마나 끔찍할까, 이런 생각을 하면 로고스는 인간의 기본 덕목이긴 하다. 용어, 개념 이런 걸로 인간을 범주화하고 싶어 하는 편의적 사고 때문에 이런 이상한 구분을 했던 것 같은데 이게 서로 넘나드는 것이어서 사실 유치한 규정이기는 하다. 이 범주 구분에 따르면 나는 에토스적 인간에 가깝다고 생각하는데, 왜냐면 로고스도 약하고 파토스도 없어서다. 뭐 때로는 로고스적이기도 하고, 또 어쩔 때는 드물지만 파토스가 터져 나오기도 한다..
여든이 다 된 어머니에게 문안 인사를 드릴 때마다 되돌아오는 말은, “아가, 팔십년을 썼으니 고장 나는 게 당연하지 않겄냐”다. 아프고 시리고 저리고 온몸이 쑤셔 오는데도 도리가 없다. 그러고 보면 유기체는 참으로 한심한 존재다. 쇳덩어리는 수천 년을 써도, 잘만 쓰면 녹슬지 않고 천년만년 가니 말이다. 유기체와 무기체, 참 다르다. 18세기 프랑스의 생리학자 르 카, 이름이 좀 긴데 퍼스트 네임은 클로드 니콜라다. 그러니까 Claude-Nicolas Le Cat. 이 분은 외과 의사였는데, 말하자면 임상의이면서 해부학자이자 당대 최고의 생리학자이기도 하다. 책도 많이 썼는데, 의학책만 쓴 게 아니라 굳이 따지자면 소위 ‘존재론’이나 ‘감각론’ 같은 철학책도 여러 권 썼다. 당대에는 인정받지 못해 거의 ..
에 등장하는 인물 스완(주인공 마르셀이 닮고 싶어했던 인물, 결국 질투심에 눈이 멀어 오데뜨라는 고급 창녀와 결혼하면서 딜레탕트로 전락하는 고상한 인문주의자)은 신문을 경멸한다. 신문은 하찮은 것에 주의력을 돌리게 하며, 본질적인 것이 씌어있는 책을 한평생 서너권밖에 읽지 않는 우리로 하여금 하잘 것 없는 내용을 읽는데 시간을 낭비하도록 하기 때문이라는 것. 저녁에 잠깐 인터넷 신문 몇 군데를 살펴보니 정말 그렇다. 조선일보 인터넷 판의 머릿기사는 온통 서태지, 이지아 관련 기사로 도배가 되어 있고, 한겨레 판은 엄기영 후보쪽 불법 선거운동, 오마이뉴스도 같은 내용이 올라와 있다. 프레시안은 뭔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이해가 안가고, 다른 신문들은 들어가보지도 않았다. 한심하여 르몽드 판을 보니 시리아 정부..
빤한 얘기지만 인간은 두 가지 삶을 동시에 산다. 하나는 세속적인 삶, 말하자면 걍 통속적으로, 다른 사람들이 살아가는대로 사는 삶이다. 사랑하고, 미워하고, 증오하고, 질투하고, 뭐 그렇게 사는 삶, 누가 내 뺨 때리면 나도 가서 때리면서 사는 삶, 제 자식 좋은 대학보내려고 학원보내고, 학원비 벌기 위해 엄마가 아르바이트하는 그런 삶, 작품 팔아 생계비에 보태려고 싫지만 잘 팔릴 것 같은 사진 찍는 작가들의 삶, 나처럼 하기 싫은 강의도 하고 쓰기 싫은 원고도 가끔씩 쓰면서 사는 그런 삶, 그러면서 지치고 피곤하면 술이나 퍼마시면서 사는 그런 삶, 에라이 더러워서 못 살겠다 하면서도 꾸역꾸역 살아가는 그런 삶이다. 근데 그렇게만 산다면 어디 사는 맛이 있나, 하여 인간은 전혀 다른 종류의 삶을 동시에..
술을 먹거나 음악을 들으면 사람은 센티멘탈해진다. 혼자 있을 때 얘기다. 반대로 여럿이 함께 마시면 수다를 떨고 여럿이 함께 들으면 격정에 휩싸인다. 그럼 혼자서 음악 들으면서 술 마시면? 이건 보통 위험하다고들 말한다. 알콜중독의 초기 증상이라고도 말하는 사람도 있다. 사실 뭐 별로 위험한 것도 아니다. 좌우간 요점을 말하자면 사람은 끊임없이 자신을 위험 속으로 몰고갈 필요가 있다. 좀 더 정확한 표현을 쓰자면 한계 너머로 자신을 밀쳐내야만 한다. 자기 자신을 문제삼지 않고서 어찌 타인을, 세계를 문제삼을 수 있겠나. 한계의 문제를 가장 먼저 철학적 성찰의 대상으로 삼은 사람은 데카르트인데, 그는 광기와 착란의 위험을 무릅쓰고 이른바 코지토를 찾아나섰다. 미친다 한들 무슨 대수란 말인가. 하지만 정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