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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들뢰즈 (5)
outopos
설 연휴에 시골집에 갔다가 참고할 게 있어 잡지 을 창간호에서부터 몇 권 들고 왔다. 1976년 겨울호부터 나왔으니 참 오랜 된, 옛날 잡지다. 지금은 미술잡지 중 계간은 없는 것으로 안다. 월간지 몇 개가 있는데, 계간이 없다는 건 좀 아쉽다. 계간미술은 세로쓰기에다 한자 병기여서 읽기가 수월치는 않다. 한겨레신문이 가로쓰기를 처음 시도하기 전에는 나도 조선, 동아 같은 세로쓰기 신문을 읽었기 때문에 낯설지는 않지만, 오랫동안 가로쓰기에 익숙해져 있다가 세로쓰기를 읽으려니까 좀 어색하기는 하다. 어쨌든, 좀 훑어보는데, 생각보다는 별로다. 워낙 오래 전에 봤던 잡지라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계간지는 월간지와는 달랐을 것이다, 라는 생각이 와르르 무너지는 그런 느낌이다. 워낙 오래 전에 발행되었던 ..
아주 오랜 전, 프랑스의 TV에서 방영했던 대담프로에서 강단철학과 카페철학의 문제를 다룬 적이 있었다. 강단철학, 그러니까 아카데믹한 철학, 대가들의 생각을 학생들에게 전달하고 가르치는, 지식 전달로서의 철학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카페철학, 다시 말해 카페에서 커피나 술을 마시면서 자유롭게 토론하는 그런 철학이 있다. 강단철학자들의 편에서는 이 카페철학이라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들 눈에는 그저 잡담 정도의, 좀 아는 체하는 얼치기 개똥철학자들의 수다 쯤으로 여겼을 법하다. 그런데 카페철학이라는 것은 프랑스의 전통에서 유서가 좀 깊다. 볼테르니 디드로니 하는 계몽주의 시대의 대가들이 이 카페철학에서 나왔고, 지금도 그 전통은 남아있다. 그 때 강단철학의 진영에서 토론자로 나온 이는 뤽..
지난 토요일 아트 선재에서 열린 국제학술심포지움 , 여러 모로 뜻깊은 행사였으나 아쉬움 또한 컸다. 사진이 낱장으로 유통되는 것이 무의미한 상황에서 이를 대량으로 복제 유통시키는 미디어와의 관계를 짚어보자는, 그리고 그 미디어가 자본주의라는 시스템 속에 있으므로 그 관계 또한 살펴보자는 취지의 학술대회였다. 프랑스 연구자 3명과 국내 연구자 4명의 발표로 진행되었다. 아쉬운 점은 역시 자본 종속성, 혹은 중독성이 강한 미디어를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에 관한 고민이 부족했다는 것. 기조 발제를 맡은 이영준 선생의 문제제기는 나름 의미 있었으나 후속 토론이 거의 전무했으며, 나머지 발제자들의 문제의식이 기조 발제와 따로 노는 듯한 인상이었다. 프랑스에서 초청받은 대표 발제자, 술라주(F. Soulage) 선생..
고통에 대한 니체의 관점, 좀 더 정확히는 타인의 고통에 대한 들뢰즈의 니체 해석. 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다. 외디푸스, 안티고네, 트로이 전쟁 등과 같은 비극이 전해주는 공포, 이것은 "신들의 시선을 즐겁게 하기 위한 놀이" 였다는 것. 인간의 편에서 보자면 신들이 정해놓은 운명(신탁, 예정된 운명이 어떤 것인지를 알면서도 벗어날 수 없다는 인간의 초라한 한계) 자체가 두려운 것이다. 자신의 운명이 파탄을 향해 있음을 알고 있는 상태로 살아가는 공포, 그것이 이미 고통이다. 신에게서 고통을 즐기는 법을 배워 온 인간들, 타인의 고통에서 "삶의 흥분제"를 찾는다. "우리의 세련됨, 또는 우리의 위선은 잔인성이 원시인에 의해 선호된 즐거움이었고, 거의 모든 쾌락 속에 요소로 들어갔을 정도까지 정력적으로..
에서 들뢰즈는 여전히 기호의 독해 가능성을 믿고 이를 실천해 옮긴다. 기호가 감추고 있는 본질, 그것을 해석할 수 있는 것은 지성뿐이다. 그 본질이란 것이 결국은 차이로 귀착하지만... 어쨌든 에 나오는 수많은 기호의 지층들 중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기호, 해석해 내기 힘든 기호는 사랑의 기호들이다. 주인공 마르셀 뿐만 아니라 그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스완도 사랑의 기호로 고통받는다. 기호는 우선 징후이며, 그것의 가장 중요한 특성은 "감성에 끼치는 강제"이자 결국 감성에 대한 "고문도구"이기도 하다. 질투에 휩싸여 총기를 잃어버리는 스완, 결국 사랑했던 오데트와 결혼에 이르지만 이후 자신이 진정으로 갈망했던 것들을 포기하고야 만다. 가 동성간의 사랑을 다루고 있다면, , 에서는 이성간의 사랑을 다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