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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희생

paixaube 2009. 8. 13. 23:38
<최소한의 변화를 생각하는 사진모임>에서 달력을 만드는 모양이다. 수익금은 용산참사 희생자들의 장례비를 보태는 데 사용한다고 한다. 희생자들을 돕겠다는 취지에서 비롯된 이 소소한 행위, 우리 사회에서 '희생'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본다.

희생은 언제나 있었다. 나를 버려 타인을, 집단을, 혹은 가치를 구하는 것, 이것이 희생일 것이다. 작은 희생부터 큰 희생까지 유형과 종류도 다양할 터이나 모든 희생은 결국 같다. 80년대에 민주주의의 쟁취를 위해 희생했던 이들도 많다. 그들의 희생이 가치를 회복시켜 주었으나 지금은 다시 예전으로 회귀하고 있다. 다시 희생이 필요한가. 그래서는 안될 터이지만 희생 없이는 안되는 것이 잔혹한 현실이다. 이미 많은 희생이 생겨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문제는 희생이 개죽음이 되지 않도록 하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희생에 대한 분노가 전염되듯 퍼져나가야 한다. 희생자(희생은 종교적 연원을 갖고 있으므로 희생양이라 부르는 편이 적합할 듯)가 결정적이다. 어떤 희생인가, 희생양이 누구인가에 따라 분노의 수위가 달라진다.

르네 지라르가 말하는 희생양, 이것도 생각해볼 만하다. 사회가 위기에 닥쳤을 때 공동체 구성원들의 폭력성을 순화하기 위해서는(폭력을 속인다고 표현하지만) 희생양이 필요하다. 분노와 적개심, 출구 없는 폭력성, 이런 것들을 잠재우려면 그 폭력을 한 곳에 집중시킬 수 있는 대상, 즉 제물이 있어야 한다. 그 제물이 희생양이다. 지라르의 생각을 따라가는 것은 여기까지만, 더 이상 의미가 없다. 이후의 논리는 로제 카이유와를 따라가는 것이 낫다. 희생의 의미를 다른 관점에서 접근하므로. 중요한 것은 폭력이 집중되어야 하는 제물은 죄가 없어야 한다는 점. 그리고 순결해야 한다는 것. 제물이 죄가 있다면, 조금이라도 불순하다면 희생이 아니라 처벌이므로. 죄값을 치르는 자 앞에서, 요컨대 처벌받는 자 앞에서 감정의 동요란 약할 터. 희생제의는 결국 속죄의식이기도 하다. 죄 없는 제물을 희생시켜야 하는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무고한 희생양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며 참회한다. 그것이 속죄의식, 즉 자기 대신 죽어가는 무고한 희생양에 대한 사죄의 몸부림이다. 희생양이 조금이라도 불순하다면 희생의 의미는 약해진다. 그래서 영리한 권력은 희생자들의 불순을 과장한다. 분노가 전염되는 것이 두려워서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