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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코 동굴벽화 본문
라스코 동굴의 깊숙한 곳, ‘우물’이라 불리는 곳에는 인간의 형상을 그려놓은 그림이 한 점 있다. 총 700점이 넘는 동물 그림 중 유일하게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는 그림이다. 이 그림의 수수께끼에 대해서는 아직도 고고인류학자들과 고미술사가들이 설득력 있는 견해를 내놓지 못하고 있다. 알타미라 동굴에도 이와 유사한 그림이 있지만, 역시 수수께끼로만 남아있다. 인간의 얼굴이 동물의 형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동굴에 남아있는 그림들의 완성도는 매우 높고 묘사의 방법 또한 매우 사실적이다. 동물의 형상은 그렇다. 그러나 유일하게 인간의 형상만은 왜곡되어 있는 것이다. 이 점에 관한 바타이유의 견해를 거칠게 정리해 본다. 라스코 동굴을 처음 발굴했던 고고인류학자 앙리 브뤠이유(Henri Breuil) 신부의 견해를 어느 정도 따르고 있다.
중기 구석기에 해당하는 오리냐크기의 인류는 동물성으로부터 막 벗어나던 시기에 있었다. 이 원시인류는 스스로를 동물과 완전히 구분하지 못한 상태에 있었음에 틀림없다. 요컨대 그들은 자기들이 막 벗어던져버린 동물성에 향수를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혹은 기이한 종으로 변해버린 자신들 스스로를 낯설어 했을 수 있고, 어떤 점에서는 자신들의 모습에 수치심이나 혐오감을 갖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혹은 자신을 동물과 비교했을 때 열등한 존재라는 의식을 갖고 있었을 수도 있다. 사실 후기 구석기 시대의 벽화, 특히 마그달레니아기(돌을 갈아 도구로 사용했다는 의미에서)에 인간의 모습이 새의 모습으로 그려지는 경우는 종종 있다. 키르크너 같은 학자는 새의 형상으로 묘사되는 인간이 엑스터시 상태에 도달한 샤만의 황홀경을 상징한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그 상태에서 샤만은 자신이 발을 딛고 있는 땅을 떠나 자유롭게 공간을 부유하면서 다른 세계로의 여행을 한다고 사람들은 믿는다는 것이다. 새의 형상은 공간으로부터의 자유를 암시한다는 얘기다. 그는 시베리아의 야쿠트 족에게 남아있는 소의 희생 제의를 해석하면서 그런 이론을 제시한다. 소를 제물로 바칠 때 소를 묶는 기둥에 새의 형상을 한 조각이 세 개가 새겨져 있는 것이 그러한 견해를 뒷받침한다. 라스코가 오리냐크 후기, 혹은 마그달레니아 전기에 속한다는 전제 하에서 야쿠트족이 여러 면에서 현대까지도 후기 구석기와 비슷한 문명을 소유하고 있다는 점을 비교해 보면 양자는 비슷하게 해석될 수 있다.
라스코의 우물 방에 그려져 있는 인간의 형상이 던져주는 문제는 왜 항상 그 시기의 인류가 동물의 형상과 인류의 형상을 그려낼 때 완전히 다른 방식을 취했는가 하는 데에 있다. 사실 인간의 형상과 동물의 형상을 그려내는 방식은 어떻게 보면 백지 한 장 차이밖에 없다. 문제는 인간의 형상을 라스코의 인류가 동물의 형상과 혼합된 방식으로 그려낼 때의 태도를 어떻게 보느냐에 있다. 오리냐크기에서부터 마그달레니아기까지 오는 동안 인류는 늘 자신의 형상을 동물의 형상과 섞어서 표현한다. 그것은 인류가 비록 형태학상으로는 완전히 동물성을 탈피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정신은 동물성과 매우 강한 친화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다. 그 시기의 인류가 자신들이 벗어던진 동물성에 향수를 갖고 있었고, 자신들이 획득한 인간성에 모멸감을 느끼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자신들의 형상이 동물의 가면을 쓰고 나타나는 이유도 바로 그런 점에서 근거한다는 것이다. 오리냐크기의 인류는 동물성으로부터 벗어나버린 자신들의 모습을 절대로 사실적으로 그려내지 않고 동물의 가면을 쓴 모습으로 변형시켜 그려냈다. 물론 프랑스 남부 도르도뉴 지역의 가르가스에서 발견된 유적을 보면 그들이 자신들의 손을 마치 판화를 찍어내듯이 그대로 재현해 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손 음화라고 불리는 벽화가 그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신체의 일부인 손바닥에만 해당한다. 탄소 분석 결과 대략 2만7천년 전의 것으로 판명이 났고, 동물들의 그림은 1만9천-1만8천년 전쯤의 것으로 판명이 되어있다. 1941년에 도르도뉴의 가비유에서 발견된 유적에서도 사람의 형상을 그려내는 모습은 있다. 가비유의 벽화에서 흥미 있는 점은 인간의 모습이 무두인(無頭人)으로 표현되어 있다는 점이다. 무두인은 그 이후에 고대 이집트의 신화에서도 다시 등장한다. 무두인이 인류의 의식 속에서야 왜 신성의 모습과 결합되어 나타나는지에 대해서는 초기 인류가 자신의 모습에 대해 가졌던 감정과의 관련 하에서 설명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인류가 자신들의 모습을 재현해내려 했던 흔적은 도처에서 발견되는데 항상 그 형상은 불완전한 상태로만 나타난다. 이는 동물성에 대해 이 원시인류가 갖고 있었던 성스러운 감정 때문이라는 것이다. 라스코에서도 역시 제의 행위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는 유물들이 상당수 발견되었는데, 그것은 곧 동물들의 그림이 제의 행위에 바쳐진 것이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자료이다. 제의는 사냥의 성공을 기원하는 주술적 목적을 갖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성스러운 동물들을 살해했다는 공포감을 극복하기 위해 그들에게 바쳤던 제의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