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utopos

에로티시즘 본문

인문

에로티시즘

paixaube 2009. 10. 19. 01:54
 

바타이유가 에로티시즘에 대해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는 책이 여럿 있다. <에로티시즘>, <에로티시즘의 역사>, <에로스의 눈물>, 이렇게 셋인데 지난주 서점에 들러보니 모두 번역이 되어 있다. 인터넷서점에 익숙하지 않은 나로서는 아직 서점을 기웃거리는 편인데, 시간이 없어 자주 들르지 못하여 그걸 모르고 있었다. <에로티시즘>, 이건 90년대에 이미 번역되어 나왔고, 나머지는 근래에 번역이 된 것 같다. 이번에 읽은 <에로티시즘의 역사>는 1957년에 출간된 <에로티시즘>의 내용과 본질적으로는 크게 다르지 않으며, 어떤 점에서는 그것을 개괄적으로 정리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갈리마르에서 나온 전집의 노트에는 이 글이 1950-51년 사이에 씌어진 것이라고 되어있다. 바타이유 생전에는 공간되지 않아 전집에만 실려 있다. <에로스의 눈물>, 이건 그가 에로티시즘 이론을 가지고 미술사를 해석해 본 흥미로운 글이다.


바타이유의 에로티시즘은 지식, 이런 차원에서 접근하면 이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매우 위험한 것이기도 하다. 에로티시즘은 오히려 지식의 차원에서 벗어나 있으며, 그것을 끊임없이 넘어서는 정신의 움직임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아무리 천하고 못 배운 사람에게도 극단의 체험”(그것이 에로티시즘인데)은 있기 때문. 에로티시즘은 지성으로 접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성을 전복시키며, 지성을 궁지로 몰아넣고, 바타이유의 표현을 빌자면 생산이 아니라 소모라서 유용한 지식과는 거리가 멀다. “인간의 활동을 무엇인가의 목적에 종속시키려 하는 인간들의 태도”를 비판하는 바타이유에게 유용성, 목적성에 묶여있는 지식이란 천박한 것이기도 하다. 그렇게 그는 서문에 “노예근성, 유익한 목적에의 굴종, 매몰은 내가 보기에는 너무너무 끔찍한 것”이며, “유익하지 않은 것, 쓸모없는 것은 아예 쳐다보려고도 하지 않는 굴종적 인간, 오직 그런 사람이 문제”라고 쓴다. 본래 인간이 그런 존재가 아님을 에로티시즘의 내밀한 경험이 입증해 준다. 인간은 쓸모 있는 것만 가지고 살지는 않는 존재이며, 나아가 쓸모없는 것 없이 살 수 없는 존재이며, 소모를 통해 자기를 가장 첨예하게 확인해나가는 그런 존재라는 것인데, 모든 것을 실용주의의 입장에서 판단하는 사람에게 이런 생각은 도대체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어쨌든 에로티시즘의 몇 가지 문제를 그의 입장에서 정리해본다.
에로티시즘은 무엇보다도 우선 성 금기의 위반과 관계가 있다. 위반은 인간에게만 고유한 것이어서 동물의 성 행위, 그러니까 교미, 이것을 에로티시즘이라 부르지는 않는다. 그래서 성 금기가 비밀의 열쇠이다. 성 금기의 가장 보편적인 형태, 혹은 가장 원초적인 형태는 근친상간의 금기이다. 프로이드에게 이것은 문명의 초석이다. 바타이유는 프로이드의 생각에 동의하지는 않고 마르셀 모스의 생각을 따른다. 레비스트로스의 생각도 부분적으로는 받아들인다. 중요한 점은 친족간의 성금기가 증여의 일종이라는 것. 모스는 증여가 원시공동체 사회에서 단순한 경제활동이 아니라, 경제적, 종교적, 정신적, 윤리적인 모든 측면에서 매우 중요했다고 언급한다. 증여, 그것은 원칙적으로 대가를 바라는 것이 아니어서 교환의 형태를 띠지는 않는다. 그것은 매우 이상한 형태의 경제활동인데, 비록 직접적인 교환은 아니지만 반대급부가 따라붙는다. 현대에도 남아있는 증여, 예컨대 선물이라는 것이 그렇다. 선물은 그냥 주는 것, 하여 교환이라 할 순 없지만 선물을 주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무언가를 기대하게 마련이다. 물론 받는 사람 입장에서도 무언가를 되돌려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는 것이 선물, 즉 증여의 바닥에 깔려있는 경제원리이다. 친족간의 혼인을 금지한다는 것은 외부공동체에 여인을 증여의 형태로 제공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다시 그 공동체 내의 남성들이 외부에서 다른 여인을 증여받을 수 있다는 의미와 같다. 근친상간의 금기는 그렇게 증여의 다른 형태라는 것이다. 에로티시즘은 바로 이 금기를 위반하는 것, 증여로 시작된 금기를 넘어서려는 욕망에서 온다.

다음은 에로티시즘에 따라붙는 추함과 역겨움, 혐오감의 문제. 성 행위는 인간의 가장 추한 부분, 그러니까 성기의 접촉으로 이루어진다. 문명사의 진행은 추함, 더러움, 이런 것들을 몰아내는 방향으로 흘러와서 에로티시즘 또한 그렇게 인식되기도 한다. 그래도 본래 에로티시즘은 그것들과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어서, 성 행위를 본능적으로 불결하다고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배설물에 대한 불쾌감, 혐오감과도 관계가 있다. 어쨌든 "우리는 우리가 태어난 과거를 상기시킬 수 있는 모든 것을 멀리 떼어놓았"으며, 그 결과 "인간은 모두가 자신들의 기원을 부끄러워하는 벼락 부자를 닮았"으며, "기원을 생각나게 하는 것은 멀리"하는지도 모르겠다. 에로티시즘은 이 더럽고 수치스러운 기원으로 회귀하려는 욕망, 혐오스런 진실을 받아들이려고 몸부림치는 그런 욕망이다.

다음은 쾌락과 소모. 여기부터는 다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