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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도 본문
상상마당에서 주관한 포럼 "광장 밖의 예술가들", 김윤환, 노순택, 조약골이 연사로 참석했다. 김윤환은 스쾃 운동을 전개하여 전시의 개념을 넓힘과 동시에 미술관이나 상업 갤러리를 통해 이루어지는 기존의 전시 형태를 전복시켜나가는 예술기획자이다. 노순택은 분단 문제를 비롯하여 한국사회 도처에 널려있는 폭력의 구조를 들추어내는 데 힘써 온 사진가, 조약골은 작곡자 겸 가수로 활동하는 아나키스트 사회운동가이다. 서로의 관심사에 차이가 있어 대화가 자꾸 분절되는 것만 제외하면 괜찮은 포럼이었다. 특별히 새로운 것을 듣지는 않았지만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문제에 대한 환기로는 충분하였다. 예를 들면 제도에 관한 문제가 그것이다.
제도, 여럿이 사는 사회 속에서 사람의 삶을 이롭게 하기 위한 모든 장치를 말하는 것이겠지. 그러나 그것은 관념적인 규정에서나 있는 말이지 실제로는 삶을 옥죄는 경우가 태반이다. 때로는 제도가 죄를 만들고 악한 사람도 만든다. 제도가 죄와 악을 만드는 기막힌 상황, 그렇다면 제도는 없어져야 하는가. 그것이 나쁜 제도 탓이라는 인식의 결과물로 나온 것이 제도를 개선한다거나 좋은 새로운 제도를 만들자거나 하는 노력이다. 그러나 수천년 동안의 문명사에서 제도의 헛점은 항상 있어왔다. 완벽한 제도란 없는 것이다. 하여 제도에 대한 헛된 믿음을 버리고 사람을 믿자, 라는 것이 제도 부정의 간단한 논리가 되겠다. 모든 제도의 총체적 부정, 이것이 아나키즘의 출발일텐데, 그렇다면 결국 아나키즘은 자기 소멸을 향한 논리가 된다. 제도가 없어지면 할 일이 없어질테니까 말이다. 스쾃도 그런 점에서는 마찬가지. 예술제도의 꽃이라 할 수 있는 미술관의 부정, 그것이 제도 밖의 공간을 점거하여 전시공간으로 활용하는 스쾃의 궁극적 타겟일테니 미술관이 사라지면 스쾃도 할 일이 없다.
그러나 부정의 가장 순수한 형태란 모름지기 어떤 무엇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부정성의 상태로만 있는 부정, 요컨대 부정의 대상이 모조리 사라져버린 후에도 여전히 남아있는 부정이 아니던가. 그것은 할 일 없는 부정, 부정의 부정성만이 긍정되는 순수 부정, 혹은 과녁도 목표도 없는 부정, 나아가 부정의 긍정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쁜 제도의 끊임없는 부정, 이것이 뜻하는 바가 이러한 순수 부정이 아닐까. 나쁜 제도란 항상 있을 것이므로, 좋은 제도라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다시 그것을 나쁜 제도라고 의심해야 할 것이므로, 그런 의심 없이는 아무리 좋은 제도라 할지라도 인간을 그 제도 속에 가둘 것이므로, 갇힌 인간은 제 아무리 좋은 제도 속에서 살아가더라도 결국은 수인에 불과할 터이므로. 하여 비록 제도 속에서 살 수밖에 없을지라도 그 제도를 부정하고자 하는 염원이 함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 순간부터 인간은 갇혀 살게 된다. 갇혀 사는 삶, 그것이 사람의 삶일 수 있겠나.
포럼이 끝나고 지인 몇과 새벽까지 술을 많이도 마셨는데, 취한 사람의 집까지 차를 태워 준 배려가 참으로 고마웠다.
제도, 여럿이 사는 사회 속에서 사람의 삶을 이롭게 하기 위한 모든 장치를 말하는 것이겠지. 그러나 그것은 관념적인 규정에서나 있는 말이지 실제로는 삶을 옥죄는 경우가 태반이다. 때로는 제도가 죄를 만들고 악한 사람도 만든다. 제도가 죄와 악을 만드는 기막힌 상황, 그렇다면 제도는 없어져야 하는가. 그것이 나쁜 제도 탓이라는 인식의 결과물로 나온 것이 제도를 개선한다거나 좋은 새로운 제도를 만들자거나 하는 노력이다. 그러나 수천년 동안의 문명사에서 제도의 헛점은 항상 있어왔다. 완벽한 제도란 없는 것이다. 하여 제도에 대한 헛된 믿음을 버리고 사람을 믿자, 라는 것이 제도 부정의 간단한 논리가 되겠다. 모든 제도의 총체적 부정, 이것이 아나키즘의 출발일텐데, 그렇다면 결국 아나키즘은 자기 소멸을 향한 논리가 된다. 제도가 없어지면 할 일이 없어질테니까 말이다. 스쾃도 그런 점에서는 마찬가지. 예술제도의 꽃이라 할 수 있는 미술관의 부정, 그것이 제도 밖의 공간을 점거하여 전시공간으로 활용하는 스쾃의 궁극적 타겟일테니 미술관이 사라지면 스쾃도 할 일이 없다.
그러나 부정의 가장 순수한 형태란 모름지기 어떤 무엇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부정성의 상태로만 있는 부정, 요컨대 부정의 대상이 모조리 사라져버린 후에도 여전히 남아있는 부정이 아니던가. 그것은 할 일 없는 부정, 부정의 부정성만이 긍정되는 순수 부정, 혹은 과녁도 목표도 없는 부정, 나아가 부정의 긍정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쁜 제도의 끊임없는 부정, 이것이 뜻하는 바가 이러한 순수 부정이 아닐까. 나쁜 제도란 항상 있을 것이므로, 좋은 제도라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다시 그것을 나쁜 제도라고 의심해야 할 것이므로, 그런 의심 없이는 아무리 좋은 제도라 할지라도 인간을 그 제도 속에 가둘 것이므로, 갇힌 인간은 제 아무리 좋은 제도 속에서 살아가더라도 결국은 수인에 불과할 터이므로. 하여 비록 제도 속에서 살 수밖에 없을지라도 그 제도를 부정하고자 하는 염원이 함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 순간부터 인간은 갇혀 살게 된다. 갇혀 사는 삶, 그것이 사람의 삶일 수 있겠나.
포럼이 끝나고 지인 몇과 새벽까지 술을 많이도 마셨는데, 취한 사람의 집까지 차를 태워 준 배려가 참으로 고마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