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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인의 아해 본문
언젠가 아내에게 이제 어린이날을 없앨 때도 됐다고 얘기한 적이 있었는데, 그게 무슨 가당찮은 소리냐, 당신이 귀찮고 피곤하니 그런 것 아니냐, 어찌 아이들한테 그리 관심이 없느냐는 핀잔만 돌아왔다. 허나 일년 내내 어린이날처럼 지내는 아이들에게 하루를 전폭적으로 할애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으리. 오히려 고아나 불우 아동들을 위한 날을 따로 만드는 편이 훨씬 낫지 않겠나.
노순택 씨의 <13인의 아해>를 보고 퍼뜩 드는 몇 가지 생각. 처음 볼 땐 무엇인지 잘 몰랐다가 블로그에 질문을 남겼더니 친절한 대답이 돌아왔다. 답변을 듣고 사진을 다시 보니 과연 그럴 수 있겠다 싶다.
아이들은 예쁘고, 귀엽다. 그야 말로 천사 같다. 길을 지나다가 해맑게 웃고 있는 아이들을 보면 입가에 절로 미소가 번진다. 머리 쓰다듬어주고 싶고, 볼에 쪽, 하고 뽀뽀해주고 싶어지는 아이들, 기분이 울적하다가도 그 모습을 보면 어느새 상쾌해진다. 나의 두 아이들도 그렇다. 키울 땐 물론 힘들다. 대부분이 그렇듯 아내가 고생했다. 허나 양육은 힘들어도 아이들은 존재 그 자체만으로 그 힘듦을 보상해 주고도 남는다. 양육 과정에서 아이들의 많은 것을 본다. 그런데 나쁜 것은 잊고 좋은 것만 기억한다. 아이를 키우는 과정에선 아이의 부정성과 싸워 정화시켜주어야 한다. 자아가 형성되면서 아이는 고집을 피우고, 이기심을 확장시켜 나가고, 욕심을 부리고, 그러면서 폭력성이 마음속에 똬리를 튼다. 자기보다 약한 아이를 깔보고, 남의 것을 뺏으려 하고, 잘 안되면 울어버리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미워하고, 업신여기고, 어른이 하는 나쁜 짓은 다 한다. 어른이나 아이나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다. 문제는 어떻게 올바르게 교육시키느냐, 이것인데, 올바로 키워내려 하지 않는 부모는 없다는 점에서 난감할 따름이다.
우리 시대 아이들의 영악함(사악함, 이렇게 부르고 싶을 때도 있다)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인간의 심성이 본래 그러하여서인가. 어쨌든 우리 사회에서 아이들의 이 영악함은 길러진 측면이 많다. 부모들의 과도한 애정이 한몫 단단히 하는 듯. 아이에 대한 부모의 애정을 탓할 까닭은 없지만, 과도한 애정은 배타적으로 흐르기 쉽고, 그것은 다시 내 아이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진다. 내 아이만 잘 되면 된다는 생각, 타인의 아이는 안중에도 없다. 그러한 마음은 보편명사로서의 ‘아이’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고유명사로서의 ‘내 아이’에 대한 집착이다. 집착에 가까운 사랑이 광기와 무어 다를 바 있겠나. 하여 우리 시대 부모들의 아이 사랑은 광기라 불러도 무방하다. 사랑받고 있음을 알 때 생겨나는 방자함이 아이들의 태도를 결정한다. 그래서 아이에 대한 무관심이 때로는 필요하다.
우리 아이들도 그랬고, 나 역시 그랬을 테지만, 아이의 식탐은 볼이 터져버릴 만큼 먹어대게 만들며, 그것도 모자라 가짜 젖을 끊임없이 빨아댄다.(사진1) 무엇이 신경을 쓰이게 했는지, 왕자처럼 유모차에 앉아있던 아이는 “왜 그러슈”라고 투덜대듯 부모 쪽을 뒤돌아본다.(사진2) 눈썰매에 태연자약하게 누워 앞도 보지 않고 미끄러져 내려가는 위태한 곡예(사진3), 아이들은 즐거우면 그만인 것이다. 그러다가 막상 고난이 닥치면 울음으로밖에 해결할 줄 모르는 나약한 인간이 아이이다. 어둠 속에서 울부짖는 아이(사진4), 애처롭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지만, 그가 어른이라면 얼마나 바보 같겠나. 사진 찍는 작가를 보면서 “뭐 하슈”라 묻듯이 얼굴을 들이대는 아이, 사진을 보는 내가 더 당황스럽다.
아이에 대한 사랑, 성역만은 아니다. 13인의 아해, 이 제목은 이상의 시 오감도에서 따왔단다. 제15호까지 이어지는 오감도의 제1호는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十三人의 兒孩가 道路로 疾走하오.
(길은막다른 골목이 適當하오)
第一의 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第二의 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중략)
第十三의 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아이들을 무서워해야 하는 세상이 오고 있다는 뜻인가. 과도한 애정 때문에 잘 보이지 않는 아이들의 부정성을 찾아나가는 작업이라고 얘기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