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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보이지 않는 용

paixaube 2011. 4. 14. 23:34
데이브 히키의 <보이지 않는 용>을 시간 나는대로 틈틈이 읽어 보았다. 역자인 박대정선생의 번역이 깔끔하다. 차분히 정독할 여유가 없는 관계로 부분부분 읽은 셈이지만, 거칠게나마 떠오르는 생각을 정리해본다. 핵심적인 의제는 '아름다움'의 문제에 걸려있다. 저자는 '무엇이 아름다운가?', 혹은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모두가 저마다 아름다움에 대한 기준이 있으므로. 이 지점에서 저자는 칸트의 후예이다. 하지만 칸트가 아름다움을 '무관심', '무개념', '무목적성' 등의 관점에서 정의하는 반면 히키는 그런 '순수미'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다. 오히려 아름다움은 욕망, 쾌락, 이념, 도덕 등 아주 복잡한 다른 범주들과 얽혀 있다.
 



어쨌든 이런 복합적인 측면에서 아름다움에 대한 감정이 생겨나고, 모두가 자기만의 아름다움을 주장, 옹호할 권리가 있으므로 이 문제는 민주주의와 깊숙히 연결되어 있다. 그것이 히키의 기본 입장이다. 하여 그는 소위 '문화전쟁'으로 불렸던 미국의 국립예술기금(NEA)을 둘러싼 보수/진보 진영간의 갈등에 대해서도 쌍방의 입장을 존중한다. 각자 자신이 믿는 '아름다움'을 지켜나갈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자기에게 아름답지 않다고 그것을 '쓰레기'니, '신성모독'이니 할 권리가 있는가? 로버트 메이플소프의 사진전에 지원됐던 예술기금 철회를 요구했던 제시 헬름스 상원의원처럼, 그리고 안드레스 세라노의 <오줌예수>에 대해 비난을 퍼부었던 알폰스 다마토 상원의원처럼 말이다. 그런 점에서 히키가 아름다움을 민주주의에 연결시키는 대목은 좀 자의적인 구석이 있다. 너무 관대하다고나 할까. 저자는 오히려 그들이 비난한 '쓰레기 예술'이나 '포르노 예술'의 '아름다움'을 변론하기에 급급하다는 인상을 준다.

그래도 하나 정확히 짚고 있는 것이 있다. '아름다움'은 '물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보는 사람의 '눈'에 있다는 대목. 특별히 새로울 것 없는 내용이어서 진부하다는 생각도 들지만 "아름다움이 90년대의 화두가 될 것이다"고 얘기했던 사람의 입장에서는 집요하게 강조해야 할 명제였을 것이다. 

또 하나 흥미로운 지적은 로버트 메이플소프의 사진이 조엘-피터 위트킨의 사진보다 더 '위험'했던 이유에 대한 언급이다. 메이플소프의 사진은 '사도-마조'로 보이는 이 해괴한 성(sex)을 '타락한 성'이라거나 잘못이라고 여기지 않았다는 것. 요컨대 위트킨의 사진이 역겨움, 혐오감을 주는 데 비해 메이플소프의 사진은 '아름답게' 보여주고 있다는 것. 미술사에 등장했던 수많은 타락과 신성모독의 주제가 '아름다움'과 결부되어 등장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본질적으로 '아름다움'은 전복적이다. 메이플소프의 사진이 지닌 전복적 힘이 바로 이 '아름다움'에 있다, 는 그런 주장이 되겠다. 부분적으로 공감하지만 그 밖에도 고려해야 할 점이 너무 많다. '아름다움', 결코 만만한 개념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역자에 따르면 히키의 이 책이 메이플소프의 '타락한 성'을 다루고 있어 국내 언론에서 소개하는 걸 꺼리고, 별로 언급하려 하지도 않는다는데, 만약 실제로 그렇다면 아주 창피한 일이다. 내용을 읽어보니 전혀 위험하지 않더구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