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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식을 포기할 것인가?

paixaube 2011. 4. 13. 23:35
지난 주에 잠깐 서점에 들렀다가 흥미로운 제목의 책이 있어 대충 훑어보았는데, 내용 파악을 완전히 하지는 못했지만 생각거리를 던져주었던 거라서 간단히 정리해 본다. <우리는 왜 개는 사랑하고 돼지는 먹고 소는 신을까>, "육식주의를 해부한다"라는 부제가 달려있다. 한마디로 얘기하자면 '우리에게 동물은 어떤 존재인가', 이런 질문이 될 것이다. 나는 육식주의자, 그 중에서도 아주 고기를 밝히는 육식주의자이기 때문에, 호, 이건 나를 해부하는 책이로구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물론 나는 돼지도 먹고, 소는 더 잘 먹고, 개도 가끔 먹기 때문에 이 제목은 정확히 나와 맞지는 않다. 어쨌든 육식주의를 아무 거리낌 없이, 반성 없이 추구하는 인류 문명사의 치부를 건드리고 있는 책인데, 결론은 좀 답답하다. 육식주의를 포기하고 채식주의를 하자고 주장하는 책은 아니다. 다만 동물에 대해 좀 제대로 성찰해 보자, 그래야만 동물학대나 학살을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지 않겠느냐, 이런 논리일텐데, 나름 의미가 있지만, 글쎄, 그래도 동물 살육은 사라지지 않을테니 본질적으로 달라지는 것은 없지 않겠나 싶다. 따라서 이 문제는 다른 방식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좀 멀리 돌아가야 한다...



마르셀 에매의 소설에 한 채식주의자의 얘기가 있다. 이름이 베르토, 딸 아이는 로베르토이다. 베르토는 채식주의자로, 여기저기 강연다니며 동물학대를 고발하고 채식을 주장하는 유명 인사이다. 딸 로베르토는 그런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여긴다. 그러던 어느 날, 로베르토가 학교에 갔다가 예정에 없이 일찍 집에 들어오게 되었다. 배가 고파 부엌에 들어가던 그녀, 집에 없어야 할 아버지 베르토와 맞닥뜨린다. 그런데 아뿔싸, 아버지 베르토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스테이크 한 조각을 포크로 찍어 입으로 막 가져가던 순간이었다. 두 사람 모두 순간 얼어붙어 버린다. 그것이 유명한 채식주의자의 모습이었다.

원래 동물이었던 인간,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동물인 인간은 같은 동물, 즉 동류를 사냥하고 그 고기를 먹으면서 인류로 진화했다. 다른 동물의 고기를 먹는 것이 동물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으므로 원래의 인간도 그랬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인간은 동물성에서 벗어나는 과정에서(아주 더디게, 오랫동안 진행되었을테지만) 살육의 의미를 어렴풋이 파악해나간다. 하지만 생존해야 하므로 사냥을 멈출 순 없었다. 하여 속죄가 필요했다. 그것이 제의의 출발이다. 그런데 죄를 사한다는 의미의 속죄, 도대체 누가 용서해주나? 원래는 당한 동물이 주체가 되어야 맞다. 그러나 여기에서 속죄의 주체는 죄지은 당사자가 된다. 따라서 죄를 지은 자가 자기를 용서하는 아주 해괴한 구조다. 그렇게밖에는 되지 않는 구조이기도 하다. 그래서 속죄란, 참으로 괴로운 것이다. 차라리 죽어버리고 싶은 마음, 이것이 진정한 속죄의식일텐데, 죽여놓고 자기도 죽는다는 것은 코메디다. 그러려면 뭐하러 살해를 저저르나, 애초에 하지 말았어야지. 따라서 속죄의식이란 아주 괴롭고 비통한 마음이면서 동시에 우스꽝스러운 것이기도 하다.

도살장에서 동물을 살육하는 모습을 한번 본 사람들은 한동안 고기를 못먹는다고들 한다. 아마 보통의 사람들은 그럴 것이다. 하지만 채식주의자가 되지는 않는다. 고기 먹기를 포기하지 않는 이상 모든 사람들은 이 살육에 동조하는 셈일텐데, 이것이 사실 딜레마다. 딜레마란 둘 중 하나를 포기해야만 해결되는 상황을 말한다. 따라서 간단한 얘기지만 고기를 먹으면서 동시에 동물살육을 멈출 순 없다. 베르토처럼 채식주의자인 체 하면서 몰래 고기를 먹는 것이 더 문제다. 내가 고기를 밝히는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인류는 고기를 포기할 수 없다. 그렇다면 동물살육은 인간의 원죄다. 받아들이기 싫고, 또 어렵더라도 받아들여야만 하는 사실인 것이다. 이를 시정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야말로 오히려 더 허위에 가깝지 않겠나 싶다. 고기, 어차피 먹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왕 먹어야 한다면 즐겁게 먹어야 살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