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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유태인

paixaube 2009. 10. 26. 21:14
 

벤야민의 저술에 나타난 유대주의적 모티프에 관한 글을 읽다 떠오르는 몇 가지 생각이 있어 정리해 본다. 핵심적인 개념은 ‘타락’이다. 수많은 유태 사상가들과 예술가들, 이들의 생각을 유태주의라는 틀 속에서 정리하기란 만만치도 않을뿐더러 접근방법이 잘못되었다 할 만큼 차이가 크고 다양하다. 혈통은 유태인이지만 그들의 ‘아비투스’는 자신이 태어난 문화권 속에서 독자적으로 형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유태인, 프랑스의 유태인, 독일의 유태인, 그리스의 유태인, 아랍의 유태인, 러시아의 유태인, 이들의 생각이 어떻게 유태인이라는 단일한 틀 속에 묶일 수 있겠는가. 하지만 ‘유태주의’는 서양에서는 중요한 학문 분과로 등장한 지 오래다. 말하자면 달라도 공통분모가 있다는 것이다.

‘타락’, 이것은 인간의 원죄를 표현한 말이다. 선악을 분별하는 능력을 갖기 이전의 인간과 그것을 알아버린 이후의 인간은 근원적으로 다르다. 인간의 타락은 후자에서 비롯된다. 타락은 존재의 강등이다. 밑바닥으로의 추락, 여기에서부터 인간의 역사는 시작한다. 타락은 인간의 탄생을 알린 사건이다. 언어의 타락, 이 또한 유태주의의 중요 화두이다. 바벨탑 이후 언어는 분화되는데, 이것이 언어의 타락을 상징하는 사건이다. 언어는 자명한 의미를 잃어버린 채 안개 속을 헤매고 소통은 표류를 거듭한다. 타락한 언어의 표면에서 진리는 가끔 반짝거리며 모습을 드러내지만 이를 알아차리기란 쉽지 않다. 언어는 그야말로 여러 차례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는 과정에서 자취를 감춰버린 양피지 위의 텍스트와도 같다. 벤야민의 생각에는 인간의 타락(모더니티는 타락의 또 다른 양태이다)과 언어의 타락(상징주의 문학에 대한 관심은 타락한 언어에서 진리의 반짝거림을 볼 수 있다는 희망에서 온다)이라는 두 개념의 축이 교차한다는 것인데, 선뜻 받아들이기는 어려워도 음미해볼 만은 하다.

어쨌든 유태주의, 이 문제는 좀 더 깊이 공부해보아야 할 주제이다. 유태인들의 목록만 열거해 보더라도 유태주의에 대한 관심은 충분하고도 남는다. 예를 들면 철학자로는 스피노자, 후설, 아도르노, 벤야민, 마르쿠제, 레비나스, 데리다, 리오타르, 예술가들 중에는 당장 떠오르는 이름만 거론해도 뒤샹, 칸딘스키, 클레, 피카소, 자코메티, 막스 에른스트, 살바도르 달리, 사진가로는 스티글리츠, 만 레이, 앙드레 케르테즈, 로버트 카파, 브라사이, 로버트 프랭크, 위트킨, 메이플소프 등을 열거할 수 있다. 그밖에도 차분하게 조사해 보면 매우 많은 현대 작가들이 혈통 상으로는 유태인의 계보에 속한다. 어째서 이렇게 많은 유태인들이 현대 사상사와 예술계에 중요한 인물로 등장하게 되었는지는 연구해 볼만하다. 유태주의, 유태학, 이런 분야가 확장되어 나가는 이유이기도 하다.